
수진 씨는 쉰여덟이었습니다. 남편과는 결혼한 지 서른세 해가 되었고, 두 아이는 이미 결혼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편과 단둘이 조용한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겉보기엔 평범하고 조용한 노년 부부의 일상이었지만, 최근 수진 씨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괜히 짜증이 났고, 별일도 아닌데 서러움이 밀려왔으며, 말하려고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묻기라도 하면 “그냥”이라고 얼버무렸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감정의 파도가 자주 요동쳤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주방에서 물을 마시다 말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특별히 속상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가슴 안이 답답하게 조여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깨는 무겁고, 가슴은 서늘하고, 자꾸만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해오던 일상들이 하나하나 벅차게 느껴졌고, 예전 같았으면 웃어넘겼을 남편의 농담조차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예전의 자신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불면이 늘었고, 아침이 무거웠으며, 저녁이면 말없이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감정이 들쑥날쑥했고, 조용한 날보다 괜히 속이 상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견디고, 넘기고,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왔을 때, 수진 씨는 조용히 몸을 돌렸습니다. 자는 척을 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 손길을 피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수진 씨의 달라진 모습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꺼낸 말은, 수진 씨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습니다.
“요즘 왜 그래? 갱년기야?”
툭 던지듯 내뱉은 그 한마디는, 수진 씨의 마음을 단번에 가라앉게 만들었습니다. 말의 내용이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감정이 쉽게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은 아팠습니다. 말투가 무심했고, 표정은 피곤해 보였고, 그 말이 나오는 타이밍마저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이해를 구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금 이 감정이 무겁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걸 ‘갱년기’라는 한 단어로 정리해버렸습니다. 그녀의 복잡한 마음은 병명처럼 규정되었고, 그 순간 수진 씨는 스스로를 변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갱년기인가 보다. 하지만… 이 감정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만 살짝 돌렸습니다. 그날 이후, 수진 씨는 더욱 말이 없어졌습니다. 말해봤자 다시 그런 식으로 들릴까 봐, 그 마음을 또 설명해야 할까 봐, 그냥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그날 밤, 수진 씨는 잠들지 못한 채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습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시계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렸습니다. 남편은 늦게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옷을 갈아입고, 익숙한 동작으로 침대에 누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짧은 대화도, 눈빛도 없었습니다. 그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유독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잠시 후, 남편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왔습니다. 수진 씨는 그 손길이 닿기 전, 아주 천천히 몸을 더 깊숙이 말았습니다. 자는 척을 했고, 호흡을 일부러 고르게 만들었습니다. 그 손이 머뭇거리다 멈췄고, 남편은 조용히 팔을 거둬들였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 누운 채 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수진 씨는 그날 처음으로 남편의 손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이 닿지 않은 것보다 마음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아팠고, 그게 더 오래 남았습니다. 남편이 미웠던 것도 아니고, 스킨십이 싫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루 종일 단절된 감정이 풀리지 않은 상태로 흘러간 그 밤에, 어떤 닿음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그냥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게 아니구나.’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부부 사이가 멀어지는 건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할 수 없어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수진 씨는 더 말이 없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에게 간단히 인사만 건넸고, 식탁에 앉아도 식사는 조용히 끝났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질문이 오면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그게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대화가 없으니 갈등도 없었고, 침묵 속에서는 누구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 없는 시간이 하나씩 늘어갔습니다.
남편은 처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며칠이면 풀릴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남편도 말을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줄자 표정도 사라졌고, 웃음도 줄어들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각자의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말 한 마디 없는 날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수진 씨는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편했습니다. 말 한마디 꺼내는 게 그토록 어려워질 줄은 예전엔 몰랐습니다. 한때는 남편과 함께 앉아 하루 일과를 나누고, TV 드라마를 보며 감상을 주고받는 일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할 거리를 떠올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이 없어졌다고, 우리 사이가 멀어진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고립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감정이 얇아졌고, 피로는 쉽게 쌓였으며, 하루를 견디는 일이 작은 전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수진 씨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오후였습니다. 창밖의 나뭇가지들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고, 수진 씨는 거실 창문을 닫으려다 남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안방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남편은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의 내용은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요즘 마누라가 완전 이상해. 갱년기 오더니 말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눈치만 보여.”
그 한마디는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수진 씨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문 앞에 서서 그 말을 가만히 들었습니다. 남편은 장난처럼 웃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뭐랄까, 그냥 집 안에 있는데도 답답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피곤해.”
수진 씨는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나 거실로 돌아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탁에 앉았고, 텔레비전을 켰지만 화면의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방금 들은 말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자신이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 걸, 저 사람은 눈치조차 못 채고 있었구나.’
‘아니, 어쩌면…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고, 함께 살아온 시간은 그날 따라 유독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수진 씨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감정적으로 혼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서로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버린 현실이 갑자기 너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오래 잠들지 못했습니다. 뒤척이다가, 천장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눈을 감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서 어떤 선이 조용히 끊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수진 씨는 식탁에 조용히 앉아 작은 메모지를 꺼냈습니다. 텅 빈 종이 위에 펜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단 한 줄만 적었습니다.
‘이번 주말, 혼자 다녀올게요. 말은 조금 쉬고 싶습니다.’
그녀는 그 쪽지를 식탁 한가운데에 올려두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문장은 남편을 향한 통보이자, 자신을 향한 선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쪽지를 본 남편은 의외라는 듯 물었습니다. “여행? 갑자기 왜? 갱년기 때문에 그래? 어디 아파?” 수진 씨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갱년기는 병이 아니에요. 변화예요. 그런데… 그 변화를 당신은 그냥 지나쳐버렸잖아요.”
남편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고, 수진 씨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방을 준비했고, 오랜만에 스스로를 위해 옷을 골랐습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숙소도 미리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계획’이 아닌 ‘여백’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습니다. 남편과 처음으로 아무 연락 없이 떨어져 있는 시간을 만들기로 했고, 그것이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수진 씨는 버스를 타고 바닷가가 있는 조용한 마을로 향했습니다.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사 마시면서도,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맞추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녀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쉼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늦게야 나를 챙기기로 한 걸까.’
그 생각이 스쳤지만, 곧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다행이야.’
버스에서 내린 수진 씨는 숙소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바닷바람이 세게 불었고, 얼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지만 싫지 않았습니다. 걷는 내내 주변을 둘러보았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오히려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닷가 근처에 자리한 작은 민박집. 방 안은 단출했고, 창문 너머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수진 씨는 짐을 풀지도 않은 채 이불 위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조용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살아왔을까.’
남편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동안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선택이 얼마나 있었는지, 스스로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다 내 선택이었지.”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에 가까웠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 마셨습니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마음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누구의 기대에도 응답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건 지금까지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날 하루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쳐놓고 멍하니 있다가, 창밖을 내다보다가, 파도 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 오래 두고 살았구나.’
‘이젠 나도, 나에게로 돌아가야겠다.’
사흘 후, 수진 씨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짐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은 고요했습니다. 집안 공기는 변한 게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분명 어딘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식탁 위에 작은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편의 손글씨였습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오래
당신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만 봤던 것 같아.
당신이 어떤 감정을 안고 있는 사람인지,
처음부터 다시 듣고 싶어.”
수진 씨는 그 글을 천천히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크지 않은 한 장의 쪽지였지만, 그 안에는 남편의 낯선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함께 살아온 수십 년 동안, 그는 자주 말하지 않았고, 표현도 서툴렀습니다. 하지만 그날, 그가 남긴 말은 짧고 조용했지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수진 씨는 쪽지를 들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텅 빈 의자 하나가 유난히 크게 보였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참았던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습니다. 억울해서도, 서러워서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누군가가 이제라도 자신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사실 하나가 마음을 풀게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그날 늦게 퇴근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을 보며 수진 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았습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간 뒤, 그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고마워요. 그 메모… 덕분에 다녀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어요.”
남편은 말없이 앉았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식탁 위엔 오랜만에 따뜻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수진 씨는 조용히 식탁에 앉은 채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짧은 눈맞춤이 있었고, 남편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나도 예전엔 괜찮았어요. 당신이 뭐라고 해도 웃을 수 있었고, 혼자 감정 정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안 되더라고요.”
남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진 씨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별말도 아닌데 마음이 상하고… 내가 나를 모르겠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냥 ‘갱년기’라고 했죠. 맞아요. 갱년기 맞아요. 근데 당신은 내가 무슨 감정을 겪고 있는지는…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가 식은 잔을 들어 입을 축였습니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고, 감정은 가라앉아 있었지만 깊었습니다.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더라고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내 마음이 무겁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남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습니다. 수진 씨는 말했습니다.
“이번엔 혼자 다녀왔지만, 사실 정말 혼자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떠난 거였어요.”
그 말에 남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같이 이야기해보자. 내가 그동안 너무 몰랐어. 미안해.”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가까워졌습니다. 말수가 많아지진 않았지만, 식탁에 놓인 작은 메모 한 장과 그 위에 덧붙인 그녀의 목소리는 오랜 시간 묻혀 있던 마음을 비로소 밖으로 꺼내게 해주었습니다.
갱년기는 단순히 감정이 흔들리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수진 씨는 그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몸의 변화도 아니고, 단순한 기분의 기복도 아니었습니다. 갱년기는 이제껏 지나온 삶의 무게가 한꺼번에 마음에 내려앉는 시기였습니다. 가족을 위해 참았던 말들, 당연하게 넘겼던 서운함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야’ 하고 미뤄뒀던 감정들이 조용히 되살아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진 씨는 어느 날 조용히 거울 앞에 앉았습니다. 거울 속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습니다. 예전보다 주름이 늘었고, 눈빛은 조금 흐려져 있었지만, 그녀는 그 얼굴을 오랜만에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말했습니다.
‘수진아, 그동안 수고 많았어. 많이 참았지. 이제는 네 감정 좀 꺼내도 돼.’
그 순간, 눈물이 한 줄기 흘렀습니다. 슬퍼서도 아니고, 억울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인정해준 순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갱년기는 위기가 아니라, 내 마음을 돌이켜보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감정을 참는 게 배려라고 생각했고, 무표정하게 버티는 게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습니다. 감정을 말할 수 있어야 관계가 유지되고, 마음을 드러낼 수 있어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나는 왜 이럴까’를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괜찮은 사람이다. 단지, 지금은 내가 나를 다시 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더 이상 남편에게 완벽하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았고, 자식들이 예전만큼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자신이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진 씨는 이제 알고 있었습니다. 갱년기는 참는 시기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동안의 침묵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이해받지 못할까 두려웠던 마음이 만든 보호막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안에 머무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물었습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수진 씨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응. 조금은. 아직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지만, 말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훨씬 나아졌어.”
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말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피곤할 땐 피곤하다고 말했고, 서운할 땐 조용히 그 감정을 꺼내 보였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반복할수록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나는 괜찮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순간,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기다려왔던 건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그랬구나”라고 말해주는 존재였다는 것을.
이제 수진 씨는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말하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이 시기를 잘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지금 괜찮아. 내 마음을 내가 먼저 안아주기로 했거든.” 그 말 속에는 그동안 꾹 눌러왔던 시간에 대한 이해와, 앞으로 나를 지키겠다는 단단한 결심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면, 그건 당신도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수없이 말했던 마음. 표현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감정. 이제는 꺼내도 괜찮습니다. 갱년기는 견디는 시기가 아닙니다. 그 시기는, 내가 나를 다시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말할 기회를 잃었던 사람이라는 걸 당신 스스로도 잊지 말아 주세요. 지금부터라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감정은 설명이 필요 없는 소중한 진심이고, 그 진심은 당신을 다시 살게 할 힘이 됩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면, 지금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그리고 구독으로, 더 많은 당신의 이야기를 함께 걸어가 주세요. 우리 모두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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